영화2016. 6. 11. 00:27





영화 곡성의 해석이 분분하다. 나름 영화를 두 번 보고 나홍진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 동영상이나 가까운 지인들과 대화로 얻은 결론은 감독이 관객을 낚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호볼호가 갈리는 영화다 보니 지인들과 토론에 빠져들게 되고, 토론이 격렬해지다 보면 이걸 가지고 왜 토론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 영화 해석에 대한 토론으로 유미의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면 다행인데, 영화 곡성이 그냥 해석만 난무하게만 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토론이 유의미하지 흘러가지 않더라도 나홍진 감독은 누구나 토론할 수 있는 훌륭한 떡밥을 만들어준 것일 수 있지만, 토론을 해도 구성의 모순 때문에 논지가 돌고 돌기만 한다면 정말 관객으로서 낚였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영화의 일관성 없는 설정으로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 종구와 무명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무명은 이 사건이 일어난 게 무당을 부른 이후에 일어났다는 단서를 알려준다.





 그리고 종구는 장모의 말을 듣고 일광을 불러드리고 결국 일광이 종구의 집에  들어오고 살을 날리는 과정으로 이어지면서 극은 파국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다른 사건에선 피부병과 정신이상 등 공통점은 보이면서도 반드시 무당이 등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일본인의 주술로 살아나는 박춘배의 살인 현장에는 무당이 살해 당하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중요한 지점으로 보이는 일본인의 의심과 공포의 대상이며, 이를 위해 무당을 불러드린 다는 공식이 모든 살해 현장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의 일관성 없음을 떠나서 주인공 중구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만 놓고 봤을 땐  상당히 기독교적 세계관이 농후한 영화로 보인다. 


 일광의 중구의 집에 들어와서 장이 든 항아리를 깨자 죽은 까마귀가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일본인과 일광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느끼게 만들며 심지어 처음엔 대립했다가 나중엔 같은 편이 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낳았다.





 하지만 나홍진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등에서 밝힌 것처럼 일광과 일본인은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다. 단지 일광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서 까마귀의 죽은 시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는 성경 창세기에 등장한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가 끝나갈 무렵 이제 밖으로 나가도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처음에 까마귀를 보냈으나 소식이 없었다. 이후 비둘기를 보내고 나서 뭍이 드러나 새싹이 돋고 있음을 알려주게 된다. 


 성경에선 까마귀를 부정적인 동물로 등장했고, 일본인이 박춘배를 살리기 위해서 주술을 하는 장면에서도 까마귀들이 그 주변에 날아든다. 


 그리고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던 장면도 차용된다. 무명이 종구에게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는 장면에서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이 장면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점으로 보인다. 결국 하나님과 마귀는 존재하지만 결국 인간은 이 둘 사이에서 자유 의지로 선택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지었기에 자유 의지를 주셨고, 결국 아담은 뱀의 꾐에 넘어간 이브가 준 사과를 먹고 범죄하게 된다. 하나님이 다른 과실은 임의로 먹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명령은 어기고서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는 각자 선택의 몫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선 성경을 통해서 돌아오는 방법과 이에 담긴 심정을 충분히 기록해 놓으셨다. 


 무명이 그런 심정을 대변하는 존재로 보기에는 무리한 부분은 있지만, 최소한 인간의 선택의 문제에 대해 감독이 그리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마귀라는 존재를 다루는 방식도 공감이 준다. 일본인과 일광은 굉장한 협업 관계다. 일본인은 사람에게 의심과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런 두려움과 의심이 어떤 병을 발병하게 만든다.


 이를 치유하게 위해서 결국 무당을 불러드린다. 앞에서 말한 다른 사건의 발병과 살인 사건의 일관성 논란은 제쳐두고, 최소한 중구의 딸 효진이 겪는 과정만 보면 그러하다. 효진의 병든 과정에서 결국 일광은 효진에게 살을 날린다. 


 일본인의 죽음 이후 중구에 집으로 온 일광은 무명을 보고 도망가지만, 일본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중구의 집으로 돌아오고, 효진은 완전히 귀신으로 빙의된 채 그 가족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두려움들과 고통 등을 겪게 되고, 이를 해결하고자 다른 방법 들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 방법 역시 그 두려움을 만드는 존재와 같은 편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을 주는 존재와 본질적으로 같은 편에게 의지와 답을 구하게 되고, 결국 죽음 이후에 진짜 사망에 이르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여러 해석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인 영화로 볼 수 있는 이런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은유와 묘사가 딱 들어맞진 않는다.  그게 딱 들어맞으면 이는 상업영화가 아닌 종교영화여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여러 대목들이 퍼즐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설정인 탓에 감독이 관객을 낚은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담고 있는 이런 부분은 공감이 되고 시사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Posted by 찬Young